항목 ID | GC059015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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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申里昌申堂山祭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창신리 |
집필자 | 한미옥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창신리 창신 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던 마을 제사.
[개설]
창신리 창신 당산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에 당산에서 마을의 수호신에게 마을 사람들의 무병과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창신 마을은 옛날에는 마을에 역참(驛站)이 있었기 때문에 역몰[역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2013년 현재 30가구에 50명이 거주하고 있다. 창신리 창신 당산제는 마을이 성촌했을 당시부터 모셔졌다고 믿으며, 총 네 군데의 당산에서 제사를 올린다.
[연원 및 변천]
창신리 창신 당산제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구전에 의하면 마을이 성촌되었을 때부터 모셔 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동안에도 마을의 당산제는 끊어지지 않고 모셔 왔는데, 2011년에 들어서서 마을 사람들의 고령화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창신 마을의 당산은 모두 네 군데이다. 마을 동쪽 도로변에 윗당산인 할아버지 당산이 있고, 서쪽에 천룡 당산인 할머니 당산이 있다. 마을 중앙에 상변 1m, 저변1.2m, 높이 1.2m, 두께 0.2m 사다리꼴의 자연석 반석이 상석(床石)처럼 놓여 있고, 그 상변에 길이 90cm, 높이 40cm, 두께 15cm 가량의 자연석을 시멘트로 밀착시켜 놓은 것이 있다. 이것이 있는 곳을 ‘동네 마당’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네 앞 남쪽에 아랫당산이 있다. 당산나무의 수종은 공히 느티나무이며, 특히 할아버지 당산의 수령은 약 300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절차]
창신리 창신 당산제는 대보름 전날 밤 네 군데에서 당산제를 모신다. 먼저 제관은 섣달 보름 즉 제일 한 달 전에 선정하는데, 헌관인 화주와 축관, 풍물을 칠 사람들을 부정이 없는 이로 뽑는다. 이들은 선정된 후로부터는 궂은 데를 가지 않고, 부정한 행위를 삼가며, 음식도 조금 먹는다. 제수를 준비하는 부인들도 부정이 없어야 하며, 목욕을 하고 음식 장만을 해야 한다. 제관들도 제사 당일에는 반드시 목욕해야 한다. 제사 비용은 호당 추렴과 자발적인 성금을 합해서 금액으로 환산하면 30만 원 정도가 든다.
제사날 밤 9시가 되면 화주 집을 나와 풍물을 울리면서 동네 샘에 가서 샘굿을 친 뒤, 할아버지 당산에 가서 풍물을 울리고, 할머니 당산으로 돌아 동네 마당을 거쳐 화주 집으로 돌아온다. 밤 10시 무렵이 되면 다시 이렇게 한 바퀴를 돌며, 세 번째는 먼저와 같이 풍물을 울리며 제수를 가지고 당산에 올라간다.
제사의 순서는 기제사와 같고 축문이 있어 독축한다. 제사는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동네 마당의 세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지내고, 아랫당산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제수는 돼지머리와 기타 기제사와 같은 음식을 모두 진설한다. 음복은 제사 때마다 하며, 소지는 제관마다 한다. 최후의 제사인 ‘동네 마당제’가 끝나면 온 동네 사람이 모여 음복하며 풍물을 울리고 즐긴다.
창신리 창신 당산제의 특징은 화주는 제사 한 달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제사 후에도 1년간 궂은 데를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타 제관들도 제사 전의 한 달과 제사 후의 석 달을 기해야 하며, 또 한 가지 특징은 동네 마당제라 하여 동네 중앙의 평지에 돌로 된 제단이 있어 여기에서 최후의 제사를 지내는 점이다.
[부대 행사]
창신리 창신 당산제의 마지막인 동네 마당제가 끝나면 온 동네 사람이 모여 음복하며 풍물을 울리고 즐긴다.
[현황]
창신리 창신 당산제는 2011년에 인구의 고령화로 인해 더 이상 제의를 지속할 수 없겠다고 판단되어 중단되었다. 2015년 현재 창신리 창신 당산제를 모시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