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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679
한자 漁-
이칭/별칭 어량살,온둘살,큰살,권징이살,죽방렴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물품·도구/물품·도구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생산|제작처 전라북도 순창군
성격 어구
재질 싸리|참대|장나무
용도 어로용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개울이나 강, 바다 등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구.

[개설]

어살은 물고기를 잡는데 사용했던 도구다. 싸리, 참대, 장나무 따위를 엮어서 개울가나 강, 바다 등에 날개 모양으로 둘러치거나 꽂아 놓는다. 나무 울타리 가운데에 그물을 달거나 길발, 깃발, 통발과 같은 장치를 하여 그 안에 고기가 들어가게 한다.

어살은 처음에는 강이나 하천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하천을 흙과 돌이나 대나무·싸리나무 등으로 가로막고 그 일부만 틔워 물이 흐르게 한 다음 그곳에 발이나 통발을 설치하여 물의 흐름에 따라 내려오는 고기를 잡는 것이 하천 어살의 원시적인 방법이다. 이를 어량(魚梁)이라고 한 것은, 어살을 설치한 모습이 흡사 하천에 다리를 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교량이라는 뜻을 지닌 ‘양(梁)’ 자를 어구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천 수역에서 유래된 어살은 바다에서 발을 설치하는 해면 어량 어법으로 발전하였다.

[연원 및 변천]

인류가 물고기를 잡아 먹기 시작한 것은 채집 수렵 시대 말기다. 구석기 시대 중기부터 물고기를 잡아먹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후기 구석기 시대에는 물고기 잡이가 더욱 성행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 유적에서 나온 사슴뿔로 만든 여러 가지 찌르개살과 작살, 그리고 같은 시기 동굴에 그려진 송어·연어·상어 등의 그림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613년 수나라 양제(煬帝)의 제2차 고구려 원정에 대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 어량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고려 시대 사료에는 어량이 비교적 자주 나타나며, 조선 시대 사료, 특히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어량이라는 말이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성종(成宗) 이후부터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량이라는 명칭이 거의 사용되지 않고 대신 어전(漁箭·魚箭)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이 무렵의 어민들이 어량을 ‘어살’이라고 불러서 이를 한자로 어전이라 표기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8세기에 저술된 『역어 유해보(譯語類解補)』에도 어살이 나온다.

2019년 4월 3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38-1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어살은 하천 바닥에 소나무 말장[말목, 가늘게 다듬어 깎아 무슨 표가 되도록 박는 나무 말뚝]을 박고 대나무를 쪼개서 발을 치는 것이다. 이때 대나무를 촘촘히 박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처럼 엮어 나가는 것이다. 냇물이 내려가는 ‘골’에 살을 놓으면 물이 들어왔다가 나갈 때 고기가 살에 갇히게 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순창군처럼 산지로 둘러싸여 크고 작은 하천이 많은 곳에서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기술이 발전하였다. 강이나 내에서 고기를 잡는 일은 농촌의 어린이와 청장년들이 한가한 때 취미삼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주로 천렵이라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때그때 필요한 어구를 직접 만들어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지역에 따른 차이점이 뚜렷하며 개성이 잘 드러난다. 어살은 원래 하천에 돌로 방죽을 쌓고, 그 일부분에 방죽 대신 통발을 설치하여 하천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고기들이 통발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관에서 어살을 설치하여 가난한 백성에게 관리하도록 하고, 등급을 나누어서 대장(臺帳)을 만들어 호조·도(道)·고을에 비치하여 일정한 어전세를 거두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10 문화재 지정 사항 반영 추가 : 2019년 4월 3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38-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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