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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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啓英 |
이칭/별칭 | 홍보(弘甫),삼도(三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영성 |
[정의]
조선 후기 순창 군수를 지낸 문관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홍보(弘甫), 호는 삼도(三島). 할아버지는 관산군(冠山君) 임광세(任光世), 아버지는 좌통례(左通禮)를 지낸 국담(菊潭) 임희중(任希重)이다. 형은 임백영(任百英)이다.
[활동 사항]
임계영(任啓英)[1528~1597]은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에서 출생하였다. 1576년(선조 9)에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진보 현감(眞寶縣監)을 지냈고, 임기가 끝난 뒤 고향에 은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7월 보성에서 전 현감 박광전(朴光前), 능성 현령 김익복(金益福), 진사 문위세(文緯世)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와병 중이던 박광전을 대신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순천에서 남원에 이르는 과정에 1,000여 명을 모집하여 전라 좌의병장(全羅左義兵將)이 되었다.
전라 우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장수·거창·합천·성주·개령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1593년(선조 26)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부장(副將) 장윤(張潤)에게 정예군 300명을 이끌고 먼저 성에 들어가게 하고, 밖에서 곡식과 무기를 조달하였으나 왜적이 성을 포위하여 성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성이 함락되고 장윤이 전사하자 그와 함께 죽지 못한 것을 죽을 때까지 통한으로 생각하였다. 화의(和議)가 성립된 뒤 양주 목사, 정주 목사(定州牧使), 해주 목사 등을 지내고 1595년(선조 28)부터 1596년까지 순창 군수를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객사하였다.
[묘소]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율어리 자모악 마을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67년(고종 4) 병조 판서 겸 동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