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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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凝香池 |
이칭/별칭 | 의향지,응양지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유적/민간 신앙 유적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서영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51년 - 응향각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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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748년 - 응향각 중수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0년 - 응향지 일부 매몰 |
최초 설립지 | 응향지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
현 소재지 | 응향지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
성격 | 수구막이용 |
전화 | 063-650-1464[순창군청 문화관광과] |
홈페이지 | www.sunchang.go.kr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순창 객사 서편에 있던 연못.
[개설]
응향지가 언제 조성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순창 객사[현 순창군청] 서쪽 앞마당에서부터 설양수 법무사 사무실, 순창 초등학교 객사 앞을 지나 순창 병설 유치원 동쪽 끝까지 이어졌고, 대교천(大橋川)[현 순창군청 앞 경천]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응향지는 지형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된 수구막이 연못이다. 문헌상에 연못 주위로 수옥루(漱玉樓), 응향각(凝香閣), 응향당(凝香塘), 관청루, 취홍정, 교용정 등 정자와 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상당히 큰 연못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응향각은 응향지에 있던 정자로 ‘연꽃 향기가 정자에 어린다’는 뜻이다.
응향지는 초여름이면 흰 연꽃이 만발하여 그 향취가 돋았으며, 달 밝은 밤이면 서객들이 배를 띄워 시를 읊조리고 술을 마시며 선유하던 명승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산업이 발달하면서 인접한 마을인 옥천동에서 흘러나오는 하수가 응향지에 고이면서 오물이 쌓이고 악취가 심하였으며 파리, 모기의 서식지가 되자 부득이하게 1980년 양종석 군수가 매몰하였다고 한다.
[위치]
순창읍 터의 주요 산인 금산에서 시작하여 순평암 뒤로 내려온 지맥이 순평암을 지나면서 동남쪽으로 돌아 내려오다가 순창군 노인회 뒤에서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내려온다. 이 지맥이 순창군 경찰서 부근에서 끊어진 듯하다가 연결되어 살짝 솟아 오른 분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 순창 초등학교 터다. 그리고 순창군 경찰서 부근에서 지맥이 내려온 곳이 순창군청 터로, 용 머리 형상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곳을 용두골이라 불렀으며, 이곳이 조그마한 고개와 같아서 용머리 고개라고 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고려 후기에 옹씨가 터를 잡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기에 옹처굴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의 형상이 용의 머리이고 순창읍 터가 홍안, 즉 기러기 형상이므로 용이나 기러기가 물이 없이 존재할 수 없기에 맑은 물을 상징하는 옥천동이라 이름 붙이고, 이곳에 관아가 들어서자 옥천군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지금의 순창군청 정문과 순창 초등학교로 들어가는 도로 옆에 물을 가둘 수 있는 연못을 인위적으로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금산 일대에서 발원하는 물이 옹성보를 거쳐 옥천동으로 흘러서 이곳에서 거대한 연못을 이루었던 것이다.
[형태]
응향각은 객관 서쪽 앞에 있던 정자로, 연못으로 통하는 큰 다리가 있고 흰 연꽃이 만발하였다. 현재의 순창군청 민원실 쪽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순화 아문(淳化衙門)이 있던 곳이다. 수옥루는 그 위에 있던 누각으로, 이곳에서 침이 떨어진 모양이 구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순창 초등학교 정문 부근에 장방청이 있었다. 장방청이란 관아 서리들이 집무하던 곳이다. 하방정(荷芳亭)은 순창군청 앞 응향당 위에 있던 정자로 연꽃 향기가 그윽한 정자라는 의미라고 추정된다. 대동창은 옛 군청 창고로, 순창읍 순화리 245번지 선명 인쇄소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담장 허물기 사업으로 담장이 없어지면서, 조경 사업의 일환으로 작은 연못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현황]
연꽃이 만발하고 배를 띄울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컸던 응향지와 정자 응향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양과 위치마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도 거의 사망하여 추억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순창의 풍류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명소가 아쉬움과 그리움만을 남긴 채 전설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순창군청 내 분수대와 물고기가 있는 조경의 용도로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는 것이 아쉽다.
응향지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의 순창 초등학교 정문 안 동헌 옆에 객사가 있었는데, 동헌에 온 벼슬아치나 귀빈들은 모두 이 객사에서 머물렀다. 1010년(현종 1) 거란군을 격퇴하였던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어떻게 순창에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순창에 와서 객사에서 쉬는데 응향당 개구리가 이날 따라 유난히 울어 댔다. 시종에게 개구리가 우는 이유를 묻자 시종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강감찬 장군은 부적을 써 주면서 응향당 개구리 등에 붙여 놓으라고 하였다. 시종이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부적을 붙여 놓으니 개구리들이 일제히 울지 않았다. 이때부터 응향당을 매립하기 전까지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전라 감사를 지냈던 이서구(李書九)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하지만, 어느 것이 정설인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