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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042
한자 官門站
영어음역 Gwanmun-cham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용출

[정의]

조선 중기·후기 경상남도 양산에 있던 지역의 보발(步撥) 역참(驛站).

[제정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의 역참 제도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기능이 거의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원인은 말 값이 뛰어 역마 확보가 어려워졌고, 역리의 도망과 그에 따른 역호의 쇠망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마의 남발과 역전의 사유화, 그리고 국가 기강의 해이로 찰방 등의 작폐가 심했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는 동안 역참제의 복구 논의가 계속 전개되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봉수제가 순수한 군사 통신 수단으로서 운영이 어렵게 되자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명(明)나라의 파발을 참고하여 전명(傳命)을 주로 담당한 파발제 설치를 의논하게 되었다.

1597년(선조 30) 5월 집의(執義) 한준겸(韓浚謙)이 명나라의 예에 의거, 파발을 설치하여 변방의 문서를 전하도록 하였다. 그 기준은 기발(騎撥)은 매 20리마다 1참(站)을 두고, 보발(步撥)은 30리마다 1참을 두도록 건의함으로써 서발(西撥)·북발(北撥)·남발(南撥)의 3대로를 근간으로 한 파발 제도가 성립되었다.

[관련기록]

『대동지지(大東地志)』 제5권 경상도 15읍 가운데 양산의 역참(驛站)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내용]

파발의 조직은 전송 수단에 따라 기발과 보발로 구분되며, 지역에 따라 서발·북발·남발로 조직되었다. 기발은 말을 타고 전하며, 25리마다 1참을 두었으나 곳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소속 관원으로는 발장(撥將) 1명, 색리(色吏) 1명, 기발군(騎撥軍) 5명과 말 5필을 배치하였다. 보발은 속보(速步)로 전달하였는데, 30리마다 1참을 두고, 발장 1명과 군정(軍丁) 2명을 배치하였다.

파발 조직은 기존의 역참과 병행하여 설치되었으며, 의주에서 한성까지의 서발은 모두 41참이 있었고, 경흥에서 한성까지의 북발은 64참, 동래에서 한성에 이르는 남발은 31참으로 조직되었다. 양산의 관문참은 이와 같은 파발 조직의 남발 31참에 속한 보발(步撥) 역참이다.

[변천]

조선 후기 파발은 1896년 근대적인 전화 통신 시설이 설치되기 시작하면서 군사 통신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되었다. 이 무렵 양산의 관문참도 역참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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