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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045
한자 內浦站
영어음역 Naepo-cham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용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조선 중기
시행연도/일시 조선 중기
폐지연도/일시 조선 말기

[정의]

조선 중기·후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있던 보발(步撥) 역참(驛站).

[제정경위 및 목적]

1597년(선조 30) 5월 집의(執義) 한준겸(韓浚謙)이 명(明)나라의 예에 의거, 파발을 설치하여 변방의 문서를 전하도록 하였다. 그 기준은 기발(騎撥)은 매 20리마다 1참(站)을 두고, 보발(步撥)은 30리마다 1참을 두도록 건의함으로써 서발(西撥)·북발(北撥)·남발(南撥)의 3대로를 근간으로 한 파발 제도가 성립되었다.

[관련기록]

『대동지지(大東地志)』제5권 경상도 15읍(慶尙道十五邑) 가운데 양산의 역참(驛站)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내용]

파발 조직은 기존의 역참과 병행하여 설치되었으며, 의주에서 한성까지의 서발은 모두 41참이 있었고, 경흥에서 한성까지의 북발은 64참, 동래에서 한성에 이르는 남발은 31참으로 조직되었다. 양산의 내포참은 이같은 파발 조직의 남발 31참에 속한 보발(步撥) 역참이다. 내포참(內浦站)이 위치한 내포는 오늘날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내포리에 해당한다.

[변천]

조선 후기 파발은 1896년 근대적인 전화 통신 시설이 설치되기 시작하면서 군사 통신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되었다. 이 무렵 양산의 내포참도 역참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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