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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비 신씨 복위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548
한자 中宗妃愼氏復位事件
이칭/별칭 삼인대 상소 사건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515년 - 장경 왕후 사망
발생|시작 시기/일시 1515년연표보기 - 중종 비 신씨 복위 사건 발생
전개 시기/일시 1515년 8월 21일 - 김정, 박상 등 체포 및 구형
종결 시기/일시 1516년 5월 - 김정, 박상 등 사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39년 - 신씨 단경 왕후로 복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44년연표보기 - 삼인대비 건립
발생|시작 장소 순창 삼인대 - 전라북도 순창군 지도보기
성격 상소 사건
관련 인물/단체 김정|박상|유옥

[정의]

1515년에 순창 군수 김정, 담양 부사 박상, 무안 현감 유옥중종의 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며 상소를 올린 사건.

[역사적 배경]

중종의 비 신씨는 1499년(연산군 5)에 중종진성 대군(晋城大君)으로 있을 때 혼인하여 부부인(府夫人)에 책봉되었다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후가 되었다. 폐비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은 여동생이 연산군의 비였으므로 연산군과 처남 매부 지간이므로 매부를 폐위시키고 사위인 진성 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일에 가담하기가 곤란하여 반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종반정을 주동하였던 세력들이 신수근을 제거하고 반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반정 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두면 훗날 후환이 있다고 여겨 중종에게 폐비를 주장을 하였고 이를 반대 하던 중종도 반정 공신들의 강압에 못 이겨 신씨를 폐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에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가 장경 왕후(章敬王后)로 결혼한 지 10년 뒤인 1515년(중종 10)에 왕자[훗날 인종]를 낳고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중종은 왕비의 죽음과 함께 당시 기상마저 불순하여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자 국정에 필요할 경우 임금의 정치의 잘잘못에 대하여 널리 신하로부터 비판의 말을 구하던 ‘구언교(求言敎)’를 내렸다. 이러한 중종의 구언교에 대한 응답이 바로 김정(金淨), 박상(朴祥), 유옥(柳沃)중종의 비 신씨 복위 상소이다.

이 상소는 중종반정 세력의 중추인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이 모두 죽은 뒤에 올린 것으로, 신씨 복위가 목적이지만 그 내면에는 반정 공신의 핵심인 이 세 명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을 몰아내려는 사림들의 본격적인 정치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중종 비 신씨 복위 사건신씨 복위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중앙 정계에 사림파의 주장과 목소리를 드높이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경과]

당시 순창 군수 김정, 담양 부사 박상, 무안 현감 유옥 등 세 사람은 비밀리에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이들이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이라 하여 삼인대(三印臺)라 불렀으며, 따라서 이 사건을 ‘삼인대 상소’라고도 한다. 김정 등이 올린 삼인대 상소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중종 10년 8월 8일조에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상소의 중요한 내용은 첫째, 국모의 위중한 지위를 강조하면서 중대한 이유와 명분 없이 신씨를 폐출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장경 왕후의 죽음으로 비게 된 왕비의 자리에 부당하게 폐출된 신비를 복위시켜야 하며 동시에 폐출에 가담한 박원종 등 공신들의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둘째로 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대통 계승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박원종 등이 연산군의 선위로 교대한 것처럼 왜곡 조작하여 중국에 이를 알린 것을 지적하면서 공명정대한 대의를 은폐한 자들을 추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상소로 신씨의 복위가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이 복위 상소는 매우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되어 곧바로 대간들의 논의가 빗발치게 되었다.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의 대간들은 중종에 관련된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고 하여 죄를 줄 것을 주장하여 중종도 이를 따르지만 사림들의 반론도 일어나 언로를 막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제기하면서 대립과 갈등이 첨예하게 일어났다.

[결과]

1515년 8월 21에 의금부가 박상김정 등을 잡아다가 공초하여 장 100대, 유배 3년에 고신을 모두 추탈할 것을 조율하였으나 장형을 속량하고 박상은 남평에, 김정은 보은에 유배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김정 등을 용서해 달라는 주청이 연이었으며, 구언을 하고서 말을 올린 사람에게 죄를 주면 언로에 방해되고 진언하는 길이 막힌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515년 11월에 조광조의 “재상이 죄 주기를 청하더라도 대간은 구제하여 언로를 넓혀야 했거늘 오히려 청죄를 한 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주청하면서 대간들을 논박하여 양사의 파직을 청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이로 인하여 김정 등을 치죄한 정당성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으며, 홍문관 직제학 김안로(金安老)가 대간의 일도 옳았고, 조광조의 비판도 옳았다는 양시설(兩是說)을 내면서 이 논리가 국면을 주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양시설을 공박하고 김정 등의 주장이 명분론적으로 정당함을 주장하면서 대간의 처사가 잘못되었다는 논리가 우세한 상황으로 바뀐다. 1516년(중종 11) 4월 거듭되는 천재지변에 대한 대책을 널리 자문하였을 때 대신과 간원들이 함께 김정 등을 석방하여 언로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을 거듭하면서 5월 김정박상의 죄를 용서하고 유배를 해제하라는 명을 내려 신비 복위 상소에서 비롯된 논란은 끝나게 된다. 또한 김정박상 등은 ‘사유가상지인(師儒可當之人)’으로 지칭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11월에는 시강관(侍講官)들이 이들을 다시 서용하자고 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신씨 복위 사건은 처음에는 대간들에 의하여 사특한 의견이라고 평가되었으나 몇 달 뒤에는 만세의 정론으로 평가가 바뀌었다. 그러나 중종 대에 신씨의 복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복위가 이루어진 것은 1739년(영조 15)으로, 상소 이후 220년 만의 일이다. 1739년 3월 유학 김태남(金台南)이 신씨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논의가 다시 일어나서 신씨의 시호를 단경(端敬)으로 정하여 복위하고 김정박상에게 증지와 증시가 내려지고 그 자손에게 시혜를 베풀도록 하였다. 1739년에 신씨단경 왕후로 복위되고 능호를 온릉(溫陵)으로 정하자 5년 뒤 1744년에 순창에서는 그들의 유서가 깃든 순창 삼인대에 사적을 기리는 삼인대 비를 세웠다.

[의의와 평가]

순창의 삼인대에서 순창 군수 김정을 중심으로 박상, 유옥신씨 복위 상소를 올린 것은 조선 전기 사림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소릉 복위 상소와 함께 사림파의 결속력과 정치 참여의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주목되었다. 그리고 순창의 삼인대 상소는 단순한 상소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사림 전체의 공의를 대변하는 것이면서 조선 전기 사림의 공감대 형성과 결속력 확보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신씨단경 왕후로 복위되자 순창에서는 삼인대의 3현을 기리는 사우(祠宇)를 건립하려고 하였지만 국가의 금령으로 신설은 이루지 못하다가 1744년(영조 19)에 유서가 깃든 순창 삼인대 비를 세우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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