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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서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879
한자 利川徐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집성지 이천 서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지도보기|건곡리지도보기
성씨시조 서신일(徐神逸)
입향시조 서영우(徐永佑)

[정의]

서신일을 시조로 하고 서영우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이천 서씨(利川徐氏)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이천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이천 서씨 입향조는 절효공(節孝公) 서릉(徐稜)의 후손인 유계(柳溪) 서영우(徐永佑)이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5만 3407가구, 17만 2072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이천은 경기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시조 서신일은 신라 제52대 효공왕(孝恭王)[897-912] 때 아간(阿干)를 지내다가 나라의 운이 다함을 알고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은거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서신일은 80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 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고려 광종(光宗) 때 대광 내의령(大匡內議令)을 지냈는데 직간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의 담판’으로 유명한 서희 역시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략가로 이름이 높았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조선 시대 문과 24명, 무과 33명, 사마시 44명 등 모두 10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입향 경위]

조선 후기 목사(牧使)를 지낸 서영우가 전라남도 무안에서 유등면 유촌리로 들어와 그 후손이 세거하고 있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 이천 서씨는 177가구, 42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의하면 유등면 유촌리 유촌 마을에 69가구, 유등면 건곡리 건곡 마을에 31가구가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유등면 유촌리화남사(華南祠)가 있다. 화남사는 고려 고종(高宗)[1214-1259] 때 인물인 서릉과 그 후손들인 서식(徐湜), 서숭로(徐崇老), 서영우(徐永佑)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946년에 지은 것이다. 서릉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자식들에게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도리를 적은 십훈(十訓)을 주어 반드시 지키게 하였다. 서릉의 8세손인 서식은 부모님이 죽자 6년간이나 시묘를 살았고, 서식의 현손인 서숭로임진왜란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휘하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이름을 남겼다. 서영우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의병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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