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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881
한자 羅州林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집성지 나주 임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유산리 지도보기
성씨시조 임비(林庇)
입향시조 임한(林漢)

[정의]

임비를 시조로 하고 임한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나주 임씨(羅州林氏)는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나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나주 임씨 입향조는 군자감 판사(軍資監判事) 임한(林漢)이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7만 3556가구, 23만 6877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나주는 현 전라남도 나주시 지역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렸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唐)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 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다가 940년(고려 태조 23) 나주로 바뀌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조인 고려의 대장군 임비는 1281년(충렬왕 7년) 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다녀온 공으로 시종 보좌 이등 공신(侍從輔佐二等功臣)에 책록되었고, 뒤이어 대장군, 충청도 도 지휘사, 판사재 사사에 이르렀다. 임비의 9세손 임탁(林卓)이 해남 감무로 있다가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회진(會津)으로 돌아가 살면서 본관을 회진으로 하였는데, 회진현이 나주에 속하자 본관을 나주로 바꾸었다.

임비의 14세손 임붕(林鵬)의 대에서 발신하여 임붕의 손자 임서(林湑)임제(林悌)의 후대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임서인조(仁祖)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고, 임제는 병마절도사 임진(林晉)의 아들로 예조 정랑 겸 지제교를 지냈다. 임서의 아들 임담(林墰)인조 때 문과에 급제, 유탁(柳濯)의 모반 사건을 처결하고 이조 판서, 의금부 판사를 지냈다. 임담의 현손이며 승지 임상원(林象元)의 아들 임한호(林漢浩)는 이조 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순조(純祖) 때 우의정을 역임하였는데,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여 서자도 벼슬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밖에 임득명(林得明)은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로 불렸다. 조선 시대에 문과 49명, 무과 16명, 사마시 132명, 역과 8명, 의과 4명, 음양과 8명, 주학 1명 등 모두 21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입향 경위]

동계면 유산리 죽말 마을나주 임씨가 정착한 것은, 전라남도 나주 회진에 있던 임한이 임진왜란 즈음에 가솔을 거느리고 남원군 아동방 유산리에 속해 있던 이곳 죽말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부터다. 임한은 임진왜란 때 군자감 판사로 남원 산성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아동방 오암굴에서 8년을 쑥을 캐어 먹으며 연명하였다고 전한다.

죽말의 나주 임씨는 조선 후기 두 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곧 임용진(林龍鎭)임문수(林文洙)가 그들이다. 임용진은 절도공파의 파조 임진(林晋)의 4세손으로서 1756년(영조 32) 태어나 1816년(순조 16)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 도사, 이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또 임용진의 당질인 임문수는 1802년(순조 2) 태어나 1849년(헌종 15)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 정랑과 병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들의 홍패가 지금도 후손의 가택에 보존되어 있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의 나주 임씨는 129가구, 3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따르면 동계면 유산리에 거주하고 있는 나주 임씨는 35가구였는데, 2011년 현재는 29가구가 산다. 이웃 마을 이동 마을에도 나주 임씨 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동계면 유산길 40-10에 있는 나주 임씨 절도공파 종중의 유물·유품 66점이 1992년 6월 20일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그중 임용진의 홍패와 교지, 유품, 문집 등은 임용진의 6세손인 임순택(林巡澤)이 보관하고 있고, 임문수의 홍패와 교지 24장을 비롯한 유품, 문집 등은 임문수의 5세손인 임준택(林俊澤)이 보관·관리하고 있다.

동계면 유산리 마을 어귀에 있는 효열비(孝烈碑)는 유산리에 살던 임병구의 아내 전주 이씨의 효성과 수절을 기리기 위해 1925년 나주 임씨 종중에서 세웠다고 한다. 동계면 유산리 유산 저수지 앞 남쪽 야산 기슭에 자리 잡은 학암정(鶴岩亭)은 1901년(고종 38) 후손들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로, 계봉(溪峰) 장영식(張令植)이 지은 시와 옥천(玉泉) 조민식(趙敏植)이 지은 「학암정기」가 걸려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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