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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918
한자 林文洙
이칭/별칭 성배(聖配),오암(鰲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유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02년연표보기 - 임문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49년 - 임문수 과거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52년 - 임문수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사헌부 지평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57년 - 임문수 사헌부 장령에 제수
추모 시기/일시 1863년 - 임문수 오암사에 배향
활동 시기/일시 1866년 - 임문수 용양위 부사직, 사헌부 장령, 사간원 헌납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68년 - 임문수 용양위 부사직, 사헌부 집의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9년 - 임문수 병조 참지, 병조 참의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883년연표보기 - 임문수 사망
출생지 임문수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유산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오암사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유산리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나주
대표 관직 병조 참의

[정의]

조선 후기 순창 출신의 문관.

[가계]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성배(聖配), 호는 오암(鰲庵). 중종 때 승지를 지낸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1486~?]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임덕화(林德華), 할아버지는 임형원(林馨遠), 아버지는 상묵재(尙默齋) 임복(林馥)이다.

[활동 사항]

임문수(林文洙)[1802~1883]는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유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면이 많았고, 재예(才藝)가 남달랐다. 1849년(헌종 15)에 문과 식년시 병과 9위로 합격하여,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나주 임씨 절도공파 종중 유품에는 임문수의 유품과 함께 홍패와 교지가 많이 남아 있다. 그에 입각해 관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임문수는 1850년(철종 1) 승문원 정자, 1851년 승문원 저작이 되고, 1852년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1855년 사간원 정언, 이조 정랑에 제수되고, 1856년 은계도 찰방으로 나갔다. 1857년 사헌부 장령, 1858년 용양위 부사직을 역임하였으며, 1860년 삼례도 찰방과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1861년(철종 12) 용양위 부사직, 사헌부 장령이 되고, 1864년(고종 1) 용양위 부사과를 거쳐, 1866년 용양위 부사직, 사헌부 장령,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1867년 용양위 사직, 사간원 사간이 되었고, 1868년 용양위 부사직,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1875년 용양위 부호군, 1879년 병조 참지, 병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임문수는 병조 참의 시절 관고에 비축미가 없음을 알리고 대책을 상소하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1883년(고종 20) 세상을 떠났다.

[묘소]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유산리 예산하 삼봉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63년(철종 14)에 순창군 동계면 유산리 삼봉산 기슭에 나주 임씨의 사당으로 창건된 오암사(鰲庵祠)에서 임문수를 향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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