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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708
한자 城隍祭
이칭/별칭 서낭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집필자 황금희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에서 성황신에게 지내던 제사.

[개설]

성황제는 한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신께 드리는 의례이다. 이를 ‘서낭제’라고도 한다.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성황신을 숭배하였음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사료로는 순창 성황 대신 사적기와 성황 대신 사적 현판 등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순창의 성황제단오에 국제관사(國祭官祀)로 거행되었으며, 민간의 세시 풍속과 맞물려 기우제의 성격을 띠는 지역 축제 형태였다.

[연원 및 변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성황 신앙이 처음 들어온 시점은 943년(고려 혜종 즉위년)에서 996년(성종 15)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의 지방 세력들은 읍치 성곽을 조성하면서 성황사를 세우고 춘추 제사를 봉행하였다. 순창 읍성에서도 옥천 설씨 가문의 충신 설공검(薛公儉)[1224~1302]이 성황 대신으로 배양되었고, 대모산성 양씨 부인과 함께 고려 후기부터 매년 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내 왔다.

순창의 성황신은 성황대왕과 성황대부인이 부부 신상으로 배향되어, 대왕과 대부인을 건곤 관계로 설정하였다. 순창의 성황제는 국제관사로 진행되었다. 고려의 성황제는 국가에서 행하는 유교식 제례와 민간에서 행하는 무속적 제례로 이원화되었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건국 이념에 맞추기 위해 성황제가 유교식으로 정비되었다가 향리와 무속인들이 힘을 합쳐 성황제를 주관하는 등 지역민의 정성으로 전통이 이어졌다.

고려 시대 성황제는 단오절의 세시 풍속으로 정착되었다. 순창의 성황제는 성황신에 대한 제사 이외에 무당들의 기우 의식이 핵심적인 내용으로 향촌 사회의 축제적 성격을 띠었다. 사회 혼란 등을 이유로 100년 간 성황제가 중단되기도 하는 등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실현시키려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문의 입지와 권력화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오랜 기간 순창의 민속 신앙으로 존재하였다.

일제 강점기까지도 순창의 성황사에는 사모관대를 착용한 남신상과 홍삼 족두리 차림의 여신상의 목각상이 있었고, 1940년 무렵 일제에 의해 성황사가 헐리면서 성황제 역시 폐지되었다. 순화리 주민의 말에 따르면 어렸을 때 성황당이 지금의 순화리 옥천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비석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 성황사 사적지를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당시 소재지에 거주하던 주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순창에 성황 신앙이 유입되어 정착·발전하는 과정에서 관련 설화와 민간 신앙 대상물을 남겼다. 홀어머니산성에는 성황신과 관련된 성곽 설화가 전해 오고 있으며, 순창읍 남계리충신리에는 성황신으로 추정되는 석인상 한 쌍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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