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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부터 고대까지 문물 교류의 허브 순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175
한자 先史-古代-文物交流-淳昌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선사/석기,선사/청동기,선사/철기,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곽장근

[개설]

순창군은 선사 시대 이래 줄곧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문화상으로 점이 지대(漸移地帶)[서로 다른 지리적 특징을 가진 두 지역 사이에 위치하여 그 중간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지대]를 이루었다. 순창군의 사통팔달 내륙 교통로는 순창 및 주변 지역의 세력 집단들이 서로 교류하는 데 가교 구실을 하였다.

순창군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 유역에서 마한의 지배자 무덤인 말 무덤이 어느 시기 일시에 자취를 감춘다. 한성 시기 백제가 금강과 섬진강을 잇는 간선 교통로를 따라 진출하여 순창 지역을 백제의 영향권에 편입시킨 결과로 판단된다. 마한의 말 무덤이 자취를 감춘 이후에는 가야계 고총(古塚)을 비롯한 어떤 유형의 수장층 분묘 유적도 조영되지 않았다.

삼국 시대 분묘 유적은 백제의 행정 치소와 교통의 중심지에 밀집하여 있는데, 순창군 순창읍 신남리백산리 등지에 백제계 분묘 유적이 분포한다. 순창군 동계면 구고리와 팔덕면 월곡리에서 구덩식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과 앞트기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함께 조사되었는데, 유물은 목 짧은 항아리[短頸壺)]와 병 등 백제 토기가 절대량을 차지하였다. 한편 순창군 등 섬진강 유역으로 대가야가 진출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선사 시대 문물 교류의 허브]

1. 석기 시대

인류가 불을 처음 이용하고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한 시기를 구석기 시대라고 한다. 순창군에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때는 후기 구석기 시대로 추정된다. 순창군 구림면풍산면 일대에서 유문암계(流紋岩系) 후기 구석기 시대 석기와 박편(剝片)[격지]이 수습되었다. 그리고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하가 유적에서 뗀석기와 몸돌, 슴베찌르개, 각추상(角錐狀) 석기, 나이프형 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의 구석기 유적 중 슴베찌르개의 밀집도가 가장 높아 구석기 시대 사냥 도구를 제작하던 곳으로 밝혀졌다. 그런가 하면 순창군과 인접한 곡성군 옥과면 제월리·송전리·주산리에서도 구석기 시대 유물이 수습되어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순창군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입증해 주었다.

신석기 시대는 토기 발명과 간석기[磨製石器] 출현 등으로 상징된다. 신석기 시대 초기에는 본격적인 농경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채집 경제에서 생산 경제로 탈바꿈하면서 정착 생활을 영위하는 생활 유적이 처음 등장한다. 그리하여 신석기 시대 유적은 대체로 하천 변이나 해안가에서 발견된다. 순창군은 섬진강 본류와 지류를 따라 양쪽에 평야와 구릉지가 넓게 펼쳐져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좋은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다.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 원촌 마을동계면 구미리의 유적에서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빗살무늬 토기 조각에는 문살문[格子門]과 점렬문(點列文), 능형 조대문(菱形組帶文), 장사선문(長斜線紋) 등의 다양한 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이 같은 유물에서 금강과 남강 유역의 신석기 문화 요소가 확인되어 신석기 시대부터 순창군을 중심으로 교류 관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상정해 볼 수 있다.

2. 청동기 시대

우리나라에서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중국 북방 문화의 영향을 받아 안정적인 농경 생활이 시작되고 간석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사회 복합도가 한층 뚜렷하게 증가한다. 청동기 시대는 토기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무문 토기(無文土器)[민무늬 토기]가 주종을 이루어 달리 무문 토기 시대라고도 불린다.

기원전 700년경부터는 이전의 화전 농법에 의한 밭농사에 비해 거의 영구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정착 농경인 논농사로 생활 방식이 바뀐다. 청동기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고인돌과 돌널무덤[石棺墓], 독무덤[甕棺墓] 등 다양한 무덤이 새롭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 원촌 유적에서 각목 돌대문 토기(刻目突帶文土器)[눈금 같은 무늬를 새긴 덧띠를 두른 토기]가 출토되어 백두대간 동쪽 남강 유역 청동기 문화와의 교류 관계가 입증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은 25개소에서 약 120기가 확인되었다. 고인돌은 주로 하천 양쪽에 평야가 펼쳐져 있거나 교통로가 지나는 순창군 동계면금과면, 인계면, 팔덕면 일대에 흩어져 있다. 1기만 있는 경우도 확인되지만, 대부분 수기 내지 수십 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특히 순창군 동계면 주월리 주월 마을 어귀 모정(茅亭) 부근에 있는 주월리 고인돌 떼는 8기가 무리 지어 있다. 1980년대 주월리 고인돌 떼 3호에서 간 돌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순창군 고인돌은 대체로 구릉지와 하천 변, 고갯마루, 산기슭에 입지를 두고 있다. 이는 다른 지역의 입지와 구별되는 차이점이 없다. 아직까지 탁자식(卓子式)[북방식]은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기반식(基盤式)[바둑판형·남방식]과 개석식(蓋石式)[구덩식·뚜껑식] 고인돌이 일색을 이룬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면서 주변 하천이나 산줄기와 평행되게 장축 방향을 두었다.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에서 2기의 고인돌이 발굴 조사를 통해 성격이 파악되었다. 1호 고인돌에서는 묘역 시설과 함께 석곽형의 묘실이 확인되었다. 순창군과 인접한 곡성군에서 고인돌을 대상으로 발굴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성격이 밝혀졌는데, 고인돌은 하부 구조가 석곽형이 주류를 이루면서 영산강과 남해안 청동기 문화가 복합된 특징을 보였다.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에서도 풍화암반층을 장방형으로 파내고 안쪽에 판석형 할석을 잇대어 놓은 돌널무덤이 조사되었다. 섬진강 강줄기와 평행되게 장축 방향을 두고 석관(石棺)의 바닥 면에 민무늬 토기를 일부러 깨서 전면에 깔았다. 순창군 고인돌과 돌널무덤은 성격이 임실군과 곡성군에서 밝혀진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순창군에서 독무덤은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90년대 순창군 인계면 중산리에서 독무덤이 모습을 드러낸 바 있었기 때문에 이른 시기의 독무덤이 조사될 것으로 점쳐진다.

섬진강 유역에 속한 순창군은 전 지역에 고인돌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점에서 청동기 시대부터 거점 지역으로 발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인돌의 밀집도가 높은 이유는 섬진강이 제공하는 풍부한 물을 통해 농경 문화가 발달하였고, 그 수계를 이용하여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결과로 보인다. 이로 말미암아 순창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 세력 집단은 안정된 경제적 기반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청동기 시대부터 선진 지역으로 급성장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말 무덤과 마한의 거점 지역]

기원전 300년을 전후하여서는 중국 연(燕)과 고조선의 무력 충돌로 고조선 유이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고조선의 준왕(準王) 및 유이민의 남하로 고인돌 사회가 급격히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면서 마한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기원 전후부터 300년경까지 약 3세기 동안을 원삼국 시대(原三國時代)라고 부른다. 이는 1970년대 고고학계에서 처음 제기된 시대 구분법으로, 삼국이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하기 전까지의 과도기적인 단계를 가리킨다. 이때 청동기의 소멸과 함께 철 생산의 성행, 고인돌의 소멸, 김해식 토기가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이전 시기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널무덤[木棺墓]과 덧널무덤[木槨墓], 독무덤이 더욱 대형화되고, 여기에 지역성이 강한 주구묘(周溝墓)와 분구묘(墳丘墓),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새롭게 출현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東夷傳) 한조(韓條)에는 마한에 54개의 소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한의 영역이 오늘날 경기 서해안·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 등지에 걸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마한의 소국은 대체로 현재 군 단위마다 하나씩 자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순창군에도 마한의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점쳐지지만, 아직은 실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 유적에서 원삼국 시대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평면 형태가 말각 방형(抹角方形)[네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사각형]으로 벽주공과 부뚜막, 장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일부 주거지에서 불탄 목재와 불에 그슬린 벽체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 같은 유구(遺構)의 속성 및 유물의 조합상을 통해 순창 지역이 호남 서부 지역의 문화 요소가 공존하며 문화상으로 점이 지대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원삼국 시대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말 무덤이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에서 조사되었다. 고원리는 백제 역평현(礫坪縣)이 설치된 곳으로 섬진강이 둥글게 휘감아 돌면서 평야가 발달하고, 그 북동쪽에서 오수천섬진강의 본류에 합류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 논에 6~8기의 말 무덤이 있었다. 말 무덤은 섬진강이 흐르는 방향과 평행되게 4기가 일렬로 자리하였고, 나머지도 열을 달리하며 정연하게 있었다.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 대가 마을에는 말 무덤과 관련한 지명이 남아 있다. 섬진강 본류에 경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평야와 구릉지가 넓게 펼쳐져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 못지않게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다.

말 무덤이란 ‘말’이 마(馬), 말은 ‘머리’ 혹은 ‘크다’는 뜻으로 우두머리에게 붙여진 관형사로 파악하여 피장자는 마한의 지배층으로 추정한다. 흔히 왕사슴을 말사슴, 왕고추잠자리를 말고추잠자리, 왕매미를 말매미, 왕벌을 말벌로 부르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현지에서 말 무덤 혹은 몰 무덤이라 불리는 무덤이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와 대강면 사석리·방산리, 곡성군 옥과면 주산리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남원시 대강면 사석리 말 무덤을 제외하면 1970년대 경지 정리 사업을 하면서 모두 유실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순창과 인접한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 말 무덤은 발굴 조사에서 마한의 분구묘로 밝혀졌다.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 말 무덤을 근거로 원삼국 시대 때도 여전히 거점 지역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 시대 백제와 가야 문화 공존]

삼국 시대 때 순창의 가장 큰 특징은 백제와 가야 문화가 공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백제가 한성 시기 간선 교통로를 따라 순창군 등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호남 정맥을 넘어 순창군 일대로 진출하는 것과 가야가 백두대간을 넘어 섬진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으려는 백제의 의도와 관련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백제가 섬진강 유역을 완충 지대로 설정함으로써 영산강 유역 마한과 가야의 연대를 차단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담겨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순창군에 지역 기반을 둔 토착 세력 집단의 실체 및 발전 과정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삼국 시대 문화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미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의하면 백제 때 순창군 순창읍에는 도실군(道實郡), 적성면에는 역평현(䃯坪縣)이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증명해 주듯이 순창군에는 삼국 시대 분묘 유적 중 백제계 유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제까지의 지표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백제의 행정 치소와 교통의 중심지에 규모가 큰 분묘 유적이 산재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신남리, 동계면 관전리는 백제의 행정 치소와 관련한 분묘 유적들로 규모가 방대하다. 이처럼 순창군은 남원시 못지않게 삼국 시대 분묘 유적의 밀집도가 높게 나타나는 특징을 갖는다. 이를 통해 백제가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인 순창군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팔덕면 월곡리에서 구덩식 돌덧널무덤과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조사되었다. 석곽은 평면 형태가 장방형을 띠며, 유구는 대부분 남북으로 장축 방향을 두었다. 벽석은 대체로 할석을 옆으로 눕혀 축조하였으며, 앞트기식과 구덩식은 입구를 남쪽에 두었다. 삼국 시대 돌덧널무덤에서 토기류와 철기류, 장신구류가 출토되었다. 유물은 주로 북벽에 치우쳐 부장되었으며, 일부는 석곽 남쪽에서도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병이 절대량을 차지하며, 목 짧은 항아리와 입 넓은 목 긴 항아리[廣口長頸壺], 세발 토기[三足土器], 굽다리 접시[高杯]도 포함되어 있다. 철기류는 가위·쇠낫[鐵鎌]·쇠도끼[鐵斧]·도자(陶瓷) 등이 있으며 출토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장신구류는 금동 귀걸이[金銅耳飾]와 청동 귀걸이[靑銅耳飾], 13호분에서 구슬이 출토되었다.

순창군에 지역 기반을 둔 토착 세력 집단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백제에 복속되었는지, 언제부터 순창군 일대가 백제의 영토에 편입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백제 때 설치된 행정 치소와 관련한 기록을 통해 순창군이 백제에 정치적으로 편입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순창군과 인접한 남원시 대강면 사석리에서도 마한의 묘제 전통을 이어받은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조사되었다. 돌방은 평면 형태가 장방형을 띠며, 널길[羨道]은 길이 50㎝ 내외로 동벽에 잇대어 마련되었다. 돌방의 동벽에 붙은 상태로 최대 복경(腹徑)[지름]이 동체(胴體)[몸체] 중앙부에 자리한 목 짧은 항아리가 출토되었는데, 5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로 편년되었다. 이를 근거로 늦은 한성 시기에 순창군 등 섬진강 유역이 백제에 정치적으로 편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웅진 천도와 그에 따른 정치적 불안으로 백제가 혼란에 빠지면서 갑자기 대내외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순창군 일대가 한동안 대가야의 영역에 편입된 것이 아닌가 싶다. 순창군 동계면 구고리와 현포리에서 늦은 시기의 가야 토기가 출토됨으로써 그럴 가능성을 증명해 주었다. 이제까지 섬진강 중류에 속한 순창군 일대가 6세기 전반 이른 시기까지 대가야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순창군과 주변 지역이 6세기 이전에 이미 백제에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암시해 주었다. 그리고 순창군 토착 세력 집단의 성격과 발전 과정, 섬진강 유역으로 백제의 진출 과정, 백제와 가야의 역학 관계를 밝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순창군 매장 문화재에 관심 촉구]

고인돌과 매장 문화재는 선사 시대부터 역사 시대까지 순창군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진솔하게 담고 있는 유적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순창군에 약 120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30여 기를 넘지 않는다. 현실이 그럼에도 행정 당국의 인식 부족으로 고인돌과 매장 문화재에 대한 최소한의 보존 대책마저 마련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한다. 흔히 역사의 실체로까지 평가받는 매장 문화재의 보존 대책을 조속히 수립하고 성격을 밝히기 위한 발굴 조사가 추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순창 역사 이야기를 재조명하기 위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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