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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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榮澤 |
영어공식명칭 | Im Yeongtae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이상범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임영택(林榮澤)[1901년~1957]은 1901년 10월 9일 익산에서 태어났다. 1923년 일제의 관립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1924년 설립되어 1946년에 국립 서울대학교로 통합] 설립 계획에 반대하여 이상재(李商在)·이승훈(李昇薰)·조만식(曺晩植)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조직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의 창립총회에 전북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4년 1월 1일 익산군 이리(裡里)에서 임종식(林宗植)·김영휘(金永輝) 등과 사회주의 비밀결사 단체인 갑자연구회(甲子硏究會)를 결성한 뒤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임영택은 1925년 4월 전주지법 군산지청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검사의 항소로 1925년 12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26년 2월 익산노동연맹창립대회 집행위원을 맡았으며, 3월에는 전북노동연맹결성대회 중앙위원, 7월에는 이리청년회 제7차 집행위원회에서 사회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10월 3일에는 익산청년연맹창립준비위원회 대표로 선임되었다.
1927년 6월 28일에는 신간회(新幹會) 익산지회 창립을 준비하며 “신간회운동은 독립운동의 수확이다.”라는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한 혐의로 임혁근(林赫根)·배헌(裵憲)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다. 임영택은 1927년 8월 31일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하여 1928년 2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벌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27년 8월 7일 임영택은 옥중에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1930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57년 10월 22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임영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