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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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港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숙정 |
[정의]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북도 순창군의 역사.
[개설]
개항기는 일반적으로 1876년(고종 13) 개항부터 1910년 국권 피탈 이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조선은 1876년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각국과 통상 조약을 맺어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외국의 근대 문물이 유입되고 조선도 위로부터 새로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근대적인 제도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외세 침입에 따른 국권 침해와 경제적 침탈, 민중의 피해도 뒤따랐다. 특히 순창을 비롯한 전라북도 지역은 쌀 생산지였기 때문에 수탈의 피해는 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순창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행정 구역]
1895년(고종 32) 고종은 칙령 제98호로 「지방 제도의 개정에 관한 안건」을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을 23부(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고 종래의 목(牧), 부(府), 군(郡), 현(縣)의 명칭과 부윤(府尹),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서윤(庶尹), 판관(判官), 현령(縣令), 현감(縣監)의 관명(官名)을 없애고 읍(邑)의 명칭을 군(郡)이라 하고 읍의 장관(長官) 관명을 군수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순창군은 남원부(南原府) 소속 15군 중 1곳으로 지정되었다. 순창군 산하에는 구암면(龜巖面), 금과면(金果面), 동계면(東溪面), 구림면(龜林面), 복흥면(福興面), 순창면(淳昌面), 쌍치면(雙置面), 유등면(柳等面), 인계면(仁溪面), 적성면(赤城面), 팔덕면(八德面), 풍산면(豊山面)이 소속되었다.
1895년 개편된 23부의 행정 구역은 1년 2개월 만에 폐지되고 1896년 8월 4일 13도제가 시행되었다. 23부제는 외견상 합리성과 획일성이 있어 보이지만 익숙한 8도제를 무시한 인위적인 획정으로 실효를 거두기 어려웠다. 이때 13도제는 대체로 종래의 8도에 바탕을 두어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는 그대로 두고 나머지 5개는 분할하였다. 전라도도 13도제 시행에 따라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개편되었다. 당시 전라북도는 치소를 전주에 두고 26개의 군을 거느렸는데 1등 군은 전주·남원 2개, 2등 군은 고부·김제·태인 3개, 3등 군은 여산·금산·익산·임피·금구·함열·부안·무주·순창·임실·진안 11개, 4등 군은 진산·만경·용안·고산·옥구·정읍·용담·운봉·구례·장수 10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순창은 3등급 군에 속하였다.
[사회]
개항기 순창 지역의 사회상을 대표하는 것은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이다. 1894년(고종 31)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은 순창 지역도 휩쓸었는데 황토현 전투(黃土峴戰鬪)와 황룡촌 전투(黃龍村戰鬪)가 벌여졌을 시기 순창 접주 우동원(禹棟源)은 담양 접주 남응삼(南應三)과 함께 활동하다가 고부 농민 봉기 소식을 듣고 백산 봉기에 참여하였다. 이때 우동원의 장남 우종삼(禹宗三)도 전투에 참여하였다. 우동원을 비롯한 각지 접주들이 황토현 전투에 참여할 시점에 순창의 농민들은 보은으로 떠나 보은집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은 2차 봉기에서 일본군과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인 결과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은 잔여 농민군 토벌에 열을 올리는데 순창 지역에서는 대동산 아래 숲정이 사정(射程)[현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재래시장 부근]에서 처형이 이루어졌다. 순창 관군의 동학 농민 토벌 기록은 『고종실록(高宗實錄)』에도 실려 있다. 1894년 9월 9일 4번째 기사를 보면 비적 떼들이 창궐하는 때 순창의 수령들이 토벌에 앞장섰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비적이란 바로 동학 농민군을 말한다.
결국 순창의 동학 농민 운동 접주 우동원 역시 7년간이나 광양·순천·곡성·남원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순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동원은 당시 상당수의 재산을 몰수당하였다. 또한 동학 농민 운동의 상징이기도 한 전봉준(全琫準) 역시 순창에서 붙잡히면서 동학 농민 운동의 불길이 순창에서 좌절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 활동 기록을 보면 1907년 12월부터 1908년 12월까지 전투만 1,976차례 펼쳐졌으며 참가한 의병 수는 15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활발한 의병 활동 중 순창 지역에서는 신보현(申甫鉉) 의병대와 양춘영(楊春泳) 의병대가 크게 활약하였다.
신보현은 1868년 순창에서 태어나 1907~1909년 순창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일제에 맞서 싸운 의병 대장으로 부하들의 재판 기록을 보면 1909년 6월 유공술(柳公述) 등이 고부군 우일면(雨日面)에서 활약하였으며, 1908년 봄에는 장성군 북하면(北下面) 약수정(藥水亭)에 주둔하던 일본군 13명과 싸운 기록이 있다. 이 무렵 임실군 강진면(江津面) 갈담(葛潭)에서 일본 군대와 충돌하였으며, 1908년 6월에는 순창군 복흥면 어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09년 12월 23일 정읍군 동면 석계촌(石溪村)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재판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양춘영은 양윤숙(楊允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875년 음력 12월 2일 순창군 구림면 금천리 국화촌에서 양석민(楊錫民)과 해주 오씨(海州吳氏)의 세 아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돈헌 유고(遯軒遺槁)』와 『남원 양씨 세적(南原楊氏世蹟)』, 무신 의사 전 참봉 양춘영 사적비명(戊申義士前參奉楊春泳事蹟碑)에 1908년 음력 4월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이 일으킨 의병에 참여하면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약 1년 5개월간 활약하다가 1909년 12월 3일 김제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단신으로 붙잡혀 사형을 당하였다. 이러한 의병들의 의거 활동이 좌절되면서 순창 지역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