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7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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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女人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박정미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97년 - 「내기로 삶터를 지켜낸 여인」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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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8년 - 「내기로 삶터를 지켜낸 여인」 『순창의 전설』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2년 12월 - 「내기로 삶터를 지켜낸 여인」 『순창의 구전 설화』상에 수록 |
관련 지명 | 비홍산, 비홍산성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
성격 | 인물담|지명 유래담 |
주요 등장 인물 | 양수생의 처 이씨|중 |
모티프 유형 | 명당 찾기|명당 지키기|명당 다툼 내기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서 양수생의 처 이씨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내기로 삶터를 지켜낸 여인」은 고려 후기 삼부인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양수생(楊首生)의 처 이씨가 비홍산(飛鴻山) 아래의 길지(吉地)를 삶터로 정해 살던 중 어떤 중에게 삶터를 뺏길 위기에서 지혜와 내기로 이를 지키고, 남원 양씨의 입향조를 세워 집안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 주는 여인의 인물담이다. 한편 남편을 일찍 여의고 남원 양씨 유복자 양사보(楊思輔)[1377~?]를 훌륭하게 양육한 양수생의 처 이씨의 지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각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高麗直提學楊首生妻烈婦李氏閭)’는 2000년 11월 17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정려는 1467년(세조 13)에 내려졌고, 비와 비각은 1774년(영조 50)에 건립되었다가 1850년(철종 1)에 중건되었다.
[채록/수집 상황]
1998년 순창 문화원에서 간행한 『순창의 전설』의 34~37쪽에 수록하였다. 또한 2002년 양상화가 편찬하고 순창 문화원에서 발행한 『순창의 구전 설화』상의 82~84쪽에도 실려 있다. 이는 양정욱이 1997년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도룡리에서 주민 조모 씨와 안동 권씨 등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내용]
양수생의 처 이씨는 고려 후기 삼부인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씨는 고려 왕조에서 대제학과 직제학을 지내던 부자가 세상을 떠나자 남은 가솔을 이끌고 남편의 고향인 남원을 찾아가게 된다. 부인은 살아갈 터전을 찾기 위해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가 사방의 정기를 살펴보니, 서북쪽 방향으로 보이는 순창의 무량산이 매우 수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 산 아래가 살 만한 곳이라 생각한 부인은 버드나무 세 가지를 꺾어다가 기러기 세 마리를 만들었다. 그 기러기 중 한 마리는 적성 운림 농소막으로 띄우고, 또 한 마리는 귀미리로, 나머지 한 마리는 마흘리로 띄었다. 잠시 뒤에 되돌아온 나무 기러기를 살펴보니 농소막 이씨 부인의 산소 자리에 내려앉았다가 돌아온 기러기는 명감 열매 하나를 입에 물고 돌아왔으며, 귀미 마을의 녹갈암에 앉았다가 돌아온 기러기는 구슬을 한 움큼 머금고 있었고, 마흘리에 갔던 기러기는 기운은 좋은데 상처를 입고 있었다. 부인은 귀미 마을 녹갈암 터가 자손을 번창시키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하고 그곳을 삶터로 정할 생각으로 찾아가 보았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이미 오두막 한 채가 지어져 있었다. 이씨 부인은 집주인에게 여인의 몸으로 이곳까지 살기 위하여 찾아왔으니 방 한 칸을 내어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집주인이 말하기를, “이 집 주인은 따로 있고, 나는 다만 집주인이 올 때까지 이곳을 지켜 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였다. 이씨 부인은 “집주인이 누구기에 그대가 와서 지키고 있단 말입니까?” 하자, 그 사람은 “나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만 구악산 산신령이 말하기를 ‘이 터 주인이 곧 찾아올 때가 되었으니 그대가 이 터를 지키고 있다가 주인이 오거든 넘겨주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씨 부인이 “누구인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터 주인에게 이곳을 넘겨줄 수 있습니까?” 하니 “주인은 모르지만 성씨가 양씨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씨 부인은 그제야 안심을 하고 내 등에 업힌 아이가 양가 성을 쓰고 있으니 자신이 이 터의 주인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그 사람은 두말없이 벌떡 일어나 큰절을 하고는 “이제 주인이 왔으니 저는 물려가겠습니다.” 하면서 몇 가지 세간을 챙겨 바람같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이씨 부인은 집터를 넓히고 새 집을 지어 가솔들을 살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중이 산에서 내려와 이 터는 이미 자기가 오래전에 봐둔 곳이라며 터를 비워달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이씨 부인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하였지만 중은 반드시 돌려받아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서로 내기를 하여 이기는 사람이 이 터를 차지하기로 하였다.
중은 달걀 한 망태를 가져오더니 “내가 이 달걀을 방바닥에서 천장에 닿도록 쌓아 올릴 것입니다. 부인께서도 저처럼 달걀을 천장에 닿도록 쌓아 올리면 부인이 이기고 제가 진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면서 달걀을 방바닥에서 천장까지 쌓아 놓았다. 이씨 부인은 이것을 보고는 태연하게 웃으면서 달걀을 천장에서부터 외줄로 쌓아 내려와 방바닥에 닿도록 하였다. 이것을 본 중은 기겁을 하고는 벌벌 떨면서 미처 몰라 뵈어 죄송하다 하고는 도망가 버렸다.
이렇게 하여 집터를 지켜낸 이씨 부인은 대대로 이 집터에서 자손을 번창시켰다. 하루는 이씨 부인의 아들이 산에서 송아지만한 멧돼지를 잡아 왔는데, 그 뱃속에 ‘무량(無量)’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푯말이 나왔다. 그래서 멧돼지를 잡은 산을 무량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부는 멀리하고 활쏘기와 사냥만을 즐겨하는 아들 때문에 이씨 부인은 병을 얻게 되었다. 아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문득 죽고 싶어 그런다. 하늘 아래 너 하나를 믿고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이제 네가 책은 접어 두고 사냥에만 열중하니 언제 공부하여 가업을 잇겠느냐. 더 기대할 것이 없는데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하였다. 이에 아들은 크게 뉘우쳐 공부에 열중하였고, 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다. 이 아들이 순창에 들어온 남원 양씨의 입향조이다. 이로부터 남원 양씨는 순창에서 번성하여 가세를 누렸다.
순창과 남원의 경계에 있는 비홍산 또는 비홍산성은 이씨 부인이 순창에 집터를 잡기 위해 기러기를 날렸던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내기로 삶터를 지켜낸 여인」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 찾기’, ‘명당 지키기’ 등이다. 지혜와 신비한 능력으로 삶터를 지킨 여인의 이야기는 각 지역에 전승되는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내기로 삶터를 지켜낸 여인」에서 기러기를 통하여 가문과 자손을 번창시킬 땅을 구한 것은 민중이 명당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단서이다. 또한 ‘명당 다툼 내기’도 「내기로 삶터를 지켜낸 여인」의 주요 모티프라고 할 수 있다. 명당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기에서 이겨야만 차지할 수 있는 땅인 것이다. 이때의 내기는 주인공이 지혜로움이나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는 점을 알려 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