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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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成文-萬石巨富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
집필자 | 박정미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2년 12월 - 「홍성문과 만석 거부」 『순창의 구전 설화』상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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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풍수담|배은담 |
주요 등장 인물 | 홍성문|김씨 |
모티프 유형 | 은혜 망각 |
[정의]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서 홍성문의 도움으로 만석 거부가 된 머슴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홍성문과 만석 거부」는 머슴살이를 살던 김씨가 풍수지리에 통달한 홍성문에게 명당자리를 얻어 만석 거부가 되었다는 풍수담이자, 홍성문의 은혜를 잊고 박대하였다가 당대에 망했다는 부자의 배은담(背恩談)이다.
[채록/수집 상황]
2002년 12월 양상화가 엮어 순창 문화원에서 간행한 『순창의 구전 설화』상의 198~199쪽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동계면 장항 마을에는 양반 집안이었으나 가난하여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경주 김씨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김 서방은 언제나 머슴살이를 면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논을 갈고 있었다. 마침 홍성문이 논두렁길을 가고 있었다. 풍수지리에 능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김 서방은 무심결에 “성문이!” 하고 불렀다. 평소 같으면 ‘샌님, 어찌 그러시오.’라고 했을 홍성문이었지만 김씨의 속마음을 알고 있던 터라 홍성문은 “왜 그려.” 하고 반말을 하였다. 그러자 김씨는 “나는 이렇게 항상 머슴살이만 하여야 되겠는가? 머슴살이나 면할 수 있는 자리를 하나 주소.” 하였다. 홍성문도 서슴없이 “아. 그려.” 하였다.
김씨는 쟁기를 논에 박아 두고 논두렁길로 나왔다. 둘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가 지나자 홍성문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 신시에 무떡이나 한 시루 해 가지고 이곳으로 나오시오.” 말을 마치고는 홍성문은 가던 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김씨는 논 가는 것을 서둘러 마치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무떡을 한 시루 만들라고 하였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김씨는 무떡 한 시루를 지게에 지고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홍성문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홍성문은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무떡을 한 덩이 맛있게 먹고는 “다음달 여드렛날 아버지 유골을 모시고 이 시간, 이곳으로 나오시오. 그리고 이 떡은 식기 전에 가지고 가서 식구들과 나누어 먹으시오.” 하였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그때에 내 가사 한 벌은 해 주어야 하오.” 하였다. 김씨는 말없이 떡을 지게에 다시 지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홍성문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김씨는 머슴살이를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에 아버지의 유골과 홍성문에게 줄 가사 한 벌을 해서 약속 장소로 나갔다. 역시나 홍성문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홍성문은 시간이 없으니 빨리 시작하자며 논두렁길 바로 위의 산기슭으로 향했다. 얼마를 올라 두 사람은 정신없이 천광을 하고서 하관을 하였다.
하관을 마친 후 좀 쉬었다 하자며 홍성문은 “삼 년 이내에 만 석을 받을 것이니 그때는 변치 말고 나를 꼭 찾아와야 합니다.” 하였다. 봉분을 만든 후 홍성문은 말없이 가사 한 벌을 집어 들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곳은 까마귀가 시체를 먹기 위하여 날아드는 모양으로 혈은 까마귀의 날개 사이에 있었다. 따라서 상대성으로 안산이 시체이어서 먹이가 가까이 있기에 혈에서 분금과 투지를 이용하여 후일 만석 거부가 될 것을 앞당기어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었다. 즉 홍성문 대사가 자연의 힘을 빌려 귀신의 공법을 빼앗아다가 천명을 고친 것이었다.
김씨는 아버지의 유택을 정하고 그해 가을을 맞았다. 생활이 어려워서 자식을 제대로 공부시킬 수 없었던 김씨는 아홉 살 난 아들을 곡성의 처갓집 서당방에서 심부름을 하며 공부하도록 보냈다. 서당방 선생은 김씨의 아들이 영리하고 심부름도 잘 해서 무척 예뻐하고, 글도 시간 나는 대로 가르쳐 주었다.
이때 서당방 선생과 잘 아는 사이인 친구가 찾아왔다. 이 친구는 곡성에서 만석 거부로 살고 있었는데, 후사를 이을 아들은 없고 무남독녀 딸 하나만을 데리고 사는 사람이었다. 이 딸이 혼인할 나이가 되어 어디 데릴사윗감이 없는 지를 알아보려고 서당방 선생을 찾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친구에게 어디 좋은 사윗감이 없냐고 하였다. 선생은 “사람이 쓸 만한 놈은 데릴사위로 안 갈 것이고, 데릴사위로 가겠다는 놈은 사람됨이 부족하고, 어디 입에 맞는 떡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때 마침 김씨의 아들이 심부름을 갖다 와서 선생에게 아뢰고 나갔다. 그런데 김씨의 아들이 만석꾼의 눈에 꼭 들었다. 만석꾼은 친구에게 저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를 물었다. 선생은 “양반집 자식으로 영리하기는 한데, 가난해서 의지할 곳이 없어 여기에서 심부름하며 글공부를 하고 있다네.” 하였다. 만석꾼은 그 아이를 사위로 삼고자 하니 그 부모와 합의를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외가를 통해 그 소식을 들은 김씨는 아들이 데릴사위로 가는 것을 허락하여 김씨의 아들은 만석꾼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사돈이 된 만석꾼은 김씨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고 집과 먹고 살 만큼의 논도 마련해 주었다. 김씨는 드디어 머슴살이를 면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만석꾼은 갑자기 병이 들어 그만 아파서 죽었고, 그 후 몇 달이 지나서는 장모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김씨의 아들은 겨우 열한 살이었고, 그의 아내는 열다섯 살이었으니 만석의 재산을 관리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었다. 결국 김씨의 아들은 아버지와 상의하여 이듬해 봄에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는 김씨의 고향인 동계면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얼마나 재산이 많았던지 금은 접시로 다리를 놓고 왔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홍성문의 말대로 만석 거부가 삼 년 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홍성문의 말대로 삼 년 안에 거부가 되었으니 마땅히 홍성문 대사를 찾아야 할 것이나 김씨는 홍 대사의 말은 까맣게 잊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복은 귀신의 공법을 빼앗아서 이룬 만석 거부였기에 반드시 홍 대사로부터 만석 거부를 대대로 이을 비책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머슴살이하던 사람이 불과 삼 년이 못 되어 만석 거부가 되었으니 머슴살이하던 때의 일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만석을 옮겨다 놓은 어느 가을날, 홍성문은 이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믿고 이곳을 찾았다. 과연 김씨가 만석 거부가 되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홍성문은 김씨의 집을 찾아갔다.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홍성문을 맞아도 시원하지 않을 판에 김씨는 높은 대청마루 위에 서서 홍성문을 보고는 하인을 시켜 바깥사랑으로 모시라고 하고는 대청마루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홍성문은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혈을 주었도다.” 혼잣말을 하고는 사자암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후 대대로 만석 거부가 될 것 같았던 김씨 집안은 당대에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홍성문과 만석 거부」의 주요 모티프는 ‘은혜 망각’이다. 우리 속담에 “뒷간에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는 말이 있다. ‘자기 일이 아주 급한 때는 통사정하며 매달리다가 그 일을 무사히 다 마치고 나면 모른 체하고 지낸다는 말’이다. 「홍성문과 만석 거부」는 이 속담의 예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사람은 모름지기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하는데, 이는 윤리적 삶을 사는 사람의 기본 덕목이다. 그러나 사람살이에서 은혜를 갚는 보은이란 덕목은 흔히 잊히기 십상이었다. 「홍성문과 만석 거부」는 이런 인간 세상의 일을 경계하기 위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 순창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홍성문과 관련된 설화로는 「사자암과 홍성문 대사」, 「명당을 팔러 다니는 홍성문」, 「보은하고 신선이 된 홍성문」, 「더벅머리 총각과 홍성문」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