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074 |
---|---|
한자 | -部隊回文山急襲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철희 |
[정의]
귀순 빨치산들로 구성된 빨치산 토벌 부대인 보아라 부대가 1951년 10월 14일에 전라북도 순창의 회문산을 급습한 사건.
[개설]
보아라 부대는 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 안에 특별히 설치된 사령관 직속 부대로서 1951년 10월부터 1953년 4월까지 1년 6개월간 존속하였다. 창설할 당시에는 38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차차 증원되어 한때는 150명 정도까지 비대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40여 명 선이 유지되었다. 부대원은 경찰관의 신분이었고 각자에게 계급도 주어졌다. 부대장은 경감, 소대장은 경사, 부대원은 순경의 계급을 받았다. 이들은 사령관 이외에는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으나, 그 대신 자체 내의 규율과 위계질서는 무척 엄격했다. 동료를 배반한 부대원은 부대원의 ‘인민재판’을 거쳐 현장 총살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보아라 부대는 결성 초기에는 다대한 전과를 올리며 명성을 날렸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긴장도가 차츰 완화되어 갔다. 그러다가 부대를 창설했던 사령관이 교체되어 새로운 사령관이 부임해 오자 곧 해체되고 말았다.
[역사적 배경]
1950년 12월 정부는 남원에 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 영주에 태백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를 각각 창설하여 빨치산 토벌 작전에 전념케 하였다. 각 전투 경찰 사령부는 연대급 부대 2개로 구성된 여단 규모였고, 직할 병력 이외에 전술 지역 내의 일반 경찰도 작전상 지휘를 할 수 있었다.
천하에 유명한 지리산의 빨치산을 상대로 악전고투하고 있던 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약칭 지전사]에, 1951년 7월 제2대 사령관으로 신상묵 경무관이 새로 부임했다. 신 사령관은 일제 강점기 때 대구 사범 학교를 졸업한 수재로, 학병으로서 일본군에 들어갔으며, 광복 이후 대한민국 경찰에 투신하여 진도, 나주, 장성 등 전라도 지역의 경찰서장을 거쳤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투에 대한 능력을 인정받아 항상 최전선에 배치되어 경찰 전투 부대를 이끌고 싸웠다. 신 사령관은 지리산에 부임해서도 빨치산에게 강력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강구해 냈는데, 그중 한 가지가 바로 보아라 부대였다.
신 사령관의 계획은 여러 방면에서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사실 빨치산을 믿고 무기를 준다는 것은 확실히 모험이었다. ‘귀순 공비’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자발적인 귀순이 아니라, 거의 체포에 가까운 억지 귀순을 시킨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은 계획을 강행하였다. 빨치산으로 형성된 빨치산 토벌 부대의 명칭을 보아라 부대라고 붙였는데, “만천하의 의심 많은 사람들아, 두고 보아라, 이 부대의 눈부신 활약을 똑똑히 보아라!”라는 의미였다. 귀순 빨치산 중에서 특히 ‘용맹하고 담대하며, 대한민국에 충성을 바칠 자세가 되어 있다고 판단되는 자들’로 인선하였다. 그들은 사령관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으면서 점차 최강의 전투 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최고 지휘관이 자기들을 전적으로 믿고서 방패막이가 되어 준다는 생각에 사기와 충성심은 한껏 고조되었다.
[경과]
1951년 10월 12일 남원 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 광장에서 보아라 부대의 발대식과 무기 수여식이 있었다. 새 제복으로 단장한 38명의 보아라 부대원들이 정렬해 있고, 그들 앞에는 M1, 칼빈, 소련식 따발총, 99식 경기관총 등이 놓여 있었다. 좌우에 마련된 귀빈석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고관들도 자리 잡고 있었다. 군악대가 전주곡 연주를 하고 사령관의 훈시, 보아라 부대장의 답사가 있었다.
그리고 각 대원들에게 1인당 150발씩 탄환을 분배하였다. 산에서는 칼빈은 고급 간부가 아니면 가지기 힘든 총이고, 또 탄환도 케이스에 10발 정도 끼워 두고 1년 내내 함부로 쓰지 못하여 노랗게 녹이 슬어서 자살용이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는데, 그들에게 윤기가 반지르르 나는 칼빈 탄환이 무더기로 지급된 것이다.
1951년 10월 12일 보아라 부대 창단식 겸 무기 수여식을 마치자마자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10월 14일 새벽 1시, 38명의 보아라 부대 전 대원이 내리퍼붓는 폭우를 뚫고 산속으로 잠입하였다. 목표는 회문산의 골짜기 안시내. 새벽 4시 안시내에 도착하여 2인조, 3인조로 조를 짜서 골짜기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30분 만에 빨치산 아지트를 발견했는데, 빨치산들은 골짜기에 천막을 쳐 놓고 토벌군이 거기까지 왔을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보아라 부대는 27명의 생포자를 앞세우고 하산하였다. 생포자는 전북도당 직속 100부대 5중대 중대장 이하 전 중대원과 도당 연락 요원들이었다.
[결과]
1차 회문산 기습을 성공시킨 후 바로 다음날인 10월 15일 새벽 2시에 다시 제2차 회문산 기습을 감행하였다. 목표는 만일사(萬日寺)의 빨치산 아지트로, 수법은 전과 동일했다. 반항하는 자는 사살했고, 손을 들고 나오는 자는 생포했다. 사살자 중에는 순창읍내의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던 기관단총의 사나이 유수만이 끼어 있었다. 유수만이 자랑하던 소련식 기관단총도 노획품이었다. 두 번에 걸친 회문산 습격으로 보아라 부대의 능력은 실증되었으며 전라북도의 빨치산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