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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794
한자 地形
영어의미역 Landform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손일

[정의]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나타나는 지표면의 기복 형태.

[개설]

양산시의 중앙을 북북동~남남서로 관류하는 양산천을 사이에 두고, 2개의 높은 산지가 양산천과 나란히 뻗어 있어 경상남도 동부에서 가장 산지가 많은 고장에 속한다. 이러한 양산의 지형은 주요 산지와 하천들이 일정한 방향, 즉 북북동~남남서로 달리고 있어 그 특징이 단층 운동에 의해 지배를 받는 구조 지형임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양산은 산지가 많고 저평한 평야가 적은 내륙 산간 지역으로 시가지와 고속국도를 비롯한 주요 도로의 경우 이러한 구조 지형의 특징에 크게 좌우되면서 형성·발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산지]

양산의 산지는 기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척량산맥인 태백산맥의 말단에 해당되며, 이 말단부가 신생대 제3기 중신세부터 일어났던 북북동~남남서 방향의 축을 가진 양산단층과 울산단층 등 일련의 단층 운동에 의해 포항 부근에서 두 갈래로 분기되면서 남남서 방향으로 뻗어있다. 두 갈래의 산지는 첫째,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의 신불산에서 시작하여 영축산(1,081m)~시살등(980.9m)~염수봉(816.1m)~오봉산(533m)으로 이어지다가 낙동강에 이르러 끝나는 영축산맥이다.

둘째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과 양산시 하북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정족산(700.1m)에서 시작하여 천성산(922.7m)~금정산(801.9m)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천성산맥이다. 이 두 갈래의 산맥은 북북동~남남서 방향의 양산단층과 울산단층에 각각 지배된 단층 산지로 천성산맥은 영축산맥에 비해 고도가 한 단계 낮고 산지의 경사가 보다 완만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산정들의 경우 저산성 노년기 산지의 특성을 띠고 있다.

[하천]

양산에는 33개의 하천이 있다. 낙동강은 국가 하천이고, 양산천·회야강·수영강을 비롯한 나머지 하천들은 지방 하천에 속한다. 이들 하천은 다음과 같은 특색을 갖고 있다. 첫째, 낙동강을 제외하면 유로가 짧고 거의 직선상이며 하상구배가 급하다. 둘째, 거의 대부분이 단층곡에 지배된 적종 하천으로서 단층선곡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셋째, 따라서 낙동강에 흘러드는 양산천 하구 일대를 제외하면 유역에 충적 평야의 발달이 미약한 편이다.

[저수지]

양산은 경상남도의 여러 지방 중에서도 과거에 농업이 성하였던 곳으로 수리 조합과 많은 수리 시설이 일찍부터 축조·건설되어 왔다. 저수지는 물길의 길목에 둑을 쌓아 만든 인공 못 또는 소류지로 식수원을 얻기도 하고 농업 용수원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양산의 저수지는 총 52개로서 대부분 농업용수용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양산천 수계로는 하북면 답곡리에 있는 성천못을 비롯하여 지산리 갈밭못과 통도사 뒤편에 있는 한들못, 초산리에 있는 초산못이 있다. 그리고 상북면 대석리에는 대석저수지가, 상삼리 샛터강당 밑에는 상삼못이, 석계리 위천에는 위천못이, 소토리 율리에는 율리못 등이 있다. 동면에는 사송리 남락의 남락골못과 가산리 옹기골 위쪽에 있는 가산소류지가 있다.

화제천 수계로는 원동면 화제리 개골에 있는 내화소류지와 외화에 있는 외화못이 있다. 이외에도 회야강 수계에는 용당동 당촌에 있는 당촌저수지, 매곡동에 있는 매곡소류지, 명곡동 정지골에 있는 명곡소류지, 평산동 못밑들에 있는 평산저수지, 소주동 신윗말에 있는 주진소류지가 있다. 수영강 수계로는 동면 법기리 본법에 있는 본법저수지 등이 있다.

[제방]

양산은 내륙 산간인데다 양산천을 비롯한 소하천들의 경우 유로가 짧고 직선거리의 하천이어서 집중 호우 시에는 쉽게 강물이 넘쳐 홍수의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에 양산주민들은 옛날부터 수해를 막기 위해 하천의 자연제방에 인공적으로 둑을 쌓아 견고한 제방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큰 비가 내려 제방이 무너져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하자 다시 보다 견고한 재방을 쌓았다. 따라서 양산 지역의 강둑 제방은 옛날부터 양산 주민의 ‘홍수와의 전쟁’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개천언]

북천 상북방 소토리로부터 곡포리에 이르기까지 수 십리에 걸쳐 축조되어 있다. 혹 우수기를 당하여 여러 산골짜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큰 물이 합하여 하천이 창일하면 읍내 앞 큰 들까지 쏟아져 닥치므로 제방을 축조하여 수해를 방지해 왔다.

1742년(영조 18) 대수가 있었을 때는 사태가 나서 수도가 막히고 읍내 평야는 홍수에 휩쓸려 상개천 제방을 무너뜨렸으니 20리 사방의 옥토가 모래와 자갈밭이 된 적도 있었다. 이로써 큰 흉년이 되니 주민이 모두 생계가 막연하여 장차 고향을 떠날 형상이었다. 군수 조복만이 경상도 관찰사에 청하여 진휼 구제하였으며, 또 조정에 상신하여 제방을 축조할 인근 군의 인력을 동원하려하니 때마침 병질이 유행하여 여의치 못하고 승려를 동원하여 공사를 재촉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군수는 초로하여 영문에 나아갔더니 순상국 김공상성이 양산군민을 위하여 자신의 포와 전과 곡을 굶주린 주민과 정한 직이 없는 자들을 모집하여 노임을 곡물로써 지급하니 장정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 들었다.

군수는 몸소 흙먼지를 무릅쓰고 현장에 나와 감독하니 사람들이 노역에 온 힘을 다하였으므로 축조할 때 허술하였던 것까지 모두 완공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축조한 제방도 1856년(철종 7)에 제방의 상단 둑이 파괴되어 호계천 물이 바로 북천으로 밀어닥쳤다. 이에 따라 제방 머리를 북정 윗 산록으로 돌려 밤나무 숲을 안고 축조하였다.

그 뒤 1922년에 토지 개혁 사업으로 양산수리조합을 창설할 때 개축을 보강하고, 1934년 대홍수 후에 다시 견고하게 쌓았으나 1969년 음력 7월 칠석날에 일어난 대홍수로 강둑이 무너지면서 큰 재해를 입게 되었다. 그 중에도 북정·신기·읍내·석산 등지의 제방에서 여러 곳이 연이어 파괴되어 수천 정보의 옥토가 모두 자갈과 모래밭으로 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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