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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개성에서 남편의 과거 합격증을 안고 내려온 이씨 부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007
한자 高麗末開城-男便-科擧合格證-李氏婦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형준

[개성에서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다]

1760년 편찬된 『옥천 군지(玉川郡誌)』 경신판(庚辰版) 열부 이씨전(烈婦李氏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직제학(直提學) 양수생(楊首生)의 부인으로 이씨가 임신 중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의 부모는 젊어서 과부(寡婦)가 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이씨의 뜻과 상관없이 재가(再嫁)를 시키려 하였으나, 이씨는 죽음으로 항거하고 아들을 낳으매 겨우 몇 년을 지나 또 강제로 시집보내려 하니 이씨는 몰래 비복(婢僕)들 서너 명과 아기를 업고 남편의 홍패(紅牌)와 대제학(大提學)인 시부(媤父)의 홍패를 간직하여 남쪽으로 양씨의 옛터인 남원부 교룡산 아래로 내려왔다. 얼마 안 되어 아지발도(阿只拔都)의 난을 만나 비홍치(飛鴻峙)에 올라 본군(本郡) 무량산(無量山) 쪽을 보고 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임을 알고 가시를 헤치고 들어가 자리를 잡으니 구미촌(龜尾村)이다.”

양수생은 고려 말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그리고 대제학이었던 양이시(楊以時)가 아버지이다. 이씨 부인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과거 합격증인 홍패를 가슴에 안고서 개성에서 남원까지 내려왔다. 양이시는 1355년(공민왕 4), 양수생은 1376년(우왕 2) 문과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377년 양이시, 양수생 부자는 모두 사망한다. 이는 고려말의 정변과 관련되어 보이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이씨 부인은 임신 중에 남편과 사별하였고, 이씨 부인이 내려온 뒤 얼마 안 되어 남원 운봉에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은 뒤에 친정 부모는 개가를 적극 권유하였으나, 이씨 부인은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 하자 아기를 업고 시복들을 데리고 남원으로 낙향하였다. 고려 말에는 부녀자들의 개가가 매우 자유로웠기에 친정에서는 나이 젊은 딸이 평생을 과부로 살아갈 처지가 안타까워 개가를 권유하였던 것이다.

이씨 부인은 개가를 권유하는 친정 부모에게 아뢰기를 “다행히 아들을 낳는다면 양씨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아기를 낳은 뒤에 시집을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설득하였다. 아들을 낳은 뒤 다시 개가를 종용하자 다시 이씨 부인이 아뢰기를 “아이가 젖을 떼지 아니하였는데 제가 지금 시집을 간다면 이 아이가 제대로 자랄지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은 양씨의 뒤를 잇게 하였는데 제가 어찌 뒤를 끊게 하겠습니까.”라며 아이가 자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다시 아이가 밥을 먹고 말을 하게 되자 이씨 부인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며 죽음을 무릅쓰고 개가를 하지 않으려 하였다.

부모의 강압에 견디지 못한 이씨 부인은 아이를 데리고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시댁이 있는 남원으로 내려왔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흘러도 오로지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온갖 고생을 겪고 남원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씨 부인의 시댁은 남원부 교룡산 아래에 있었다. 이씨 부인은 아지발도 난 발발 전에, 추정하건대 1379년이나 1380년에 남원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순창군 지역 사학자인 양상화는 양이시가 파주에서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주에서 임진강을 이용하여 개성까지 뱃길로 왕래하는 데 훨씬 용이하였다고 한다. 양이시의 묘소가 파주 파평산 아래 돌고개 근처에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자손만대 누릴 복록의 땅을 찾아 나서다]

운봉에서 9월에 발발한 아지발도 난의 아지발도는 왜적의 적장이었다. 이 왜적들은 봄에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군산 진포를 공격해 왔고, 최무선 장군이 화포를 이용하여 섬멸하자 패잔병들이 도망쳐서 옥천·성주를 거쳐 함양에 이르렀고, 다시 북상하기 위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남원 운봉을 공격해 오고 있었다. 함양 사람을 모두 죽이고 운봉에 불을 지르고 인월에 주둔해 있으면서, 말을 배불리 먹여 북쪽으로 진격한다고 떠드니 나라 안팎이 크게 놀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우왕은 젊은 장수인 이성계(李成桂)를 운봉에 급파하였고 이성계는 운봉을 뛰어넘고 황산으로 내달려 정봉에 올라가서 형편을 살펴보고는 날쌘 군사들을 앞뒤로 호응하여 적을 공격하니 10배가 넘는 아지발도의 적군들을 모두 무찔렀다. 이 전쟁을 황산 대첩이라 하였다. 이씨 부인은 이부 종사(二夫從事)를 거절하고 양수생의 아들 양사보(楊思輔)를 등에 업고, 남편과 시아버지의 과거 합격증을 가슴에 품고, 천리 먼 길 남원으로 내려왔다. 오로지 집안의 대를 잇고자 하는 신념으로 온갖 고통스러움을 무릅쓰고 파주에서 남원까지 걸어서 내려온 것이다.

정절보다는 가계를 잇고자 함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남원에 도착한 이씨 부인은 아지발도가 운봉 인월에서 사람을 죽이고 들에 불을 질러 대며 위협을 하는 상황에서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씨 부인은 교룡 산성에 은거하면서 성안에 우물을 파고 웅거의 채비를 차리던 중 고민 끝에 아지발도가 있는 곳과 반대편인 순창 쪽으로 길을 떠나기로 하였다. 산성을 내려가 옛집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그보다는 새로 좋은 터를 잡아서 자손들이 오래도록 복록(福祿)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축복 받은 땅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순창 군지』에 등장하듯이, 이씨 부인은 남원부 대산면에 위치한 비홍치 고갯마루에 올랐다. ‘비홍치’는 기러기를 날려 보내는 고갯마루라는 지명이다. 비홍치에 올라 사방의 산의 정기를 살피는데 서북간방(西北艮方)으로 보이는 순창 구악산(龜岳山)이 매우 수려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저 산 아래라면 내 자손이 살 만한 곳이 있겠구나 생각하고 마술을 부렸다.

이씨 부인은 비홍치에서 버드나무 세 가지를 꺾어다가 기러기 세 마리를 만들어 날려 보냈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손으로 주물럭거려 만든 나무오리를 날려 보내는 술법은 당시 마을을 택지(擇地)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씨 부인이 첫 번째로 날려 보낸 나무오리는 순창군 적성면 운림리 농소막으로 떨어지고, 또 한 마리는 동계면 구미리(龜尾里) 녹갈암(鹿渴岩)으로 떨어지고, 또 한 마리는 인계면 마흘리에 떨어졌다. 잠시 후에 되돌아온 세 마리의 나무 기러기를 살펴보니, 농소막 이씨 부인의 산소 자리에 내려앉았다가 돌아온 놈은 명감 열매 하나를 입에 물고 돌아왔으며, 구미리에 있는 녹갈암에 앉았다가 돌아온 놈은 입에 구슬을 한 움큼 머금고 돌아왔으며, 마흘리 팔명당 자리에 앉았다가 돌아온 놈은 기운은 좋은데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이를 본 이씨 부인은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농소막에 내 신위지지(神位之地)를 정하면 이후에 내 자손이 적성강(赤城江) 물이 마르도록 번성할 것이요, 마흘리는 대명당(大明堂)이기는 하나 그 자손에서 불상사가 있을 것이니 자손에 허갈이 난 내가 어찌 부귀만을 취할 것인가 하고, 구미리 녹갈암 터는 내 자손이 백세(百歲) 되도록 복록을 누릴 곳이니 그곳이 가히 내가 살터로다 하며, 곧바로 그곳을 찾아갔는데 과연 녹갈암 일대에는 정기가 서려 있고 그 자리에는 이미 오두막 한 채가 지어져 있었다. 주인을 만나서 “이 터는 내 것이니 비워 달라.”라고 하였으나 주인은 좀처럼 듣지 않고 말하기를 “이 터가 내 것이 아님은 사실이나 따로 주인이 있는 땅이니 댁도 어서 돌아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택지법은 고려 시대에 사찰의 터를 택할 때 쓰는 술법이었다. 이씨 부인의 택지에 따라 실제 농소막에는 이씨 부인의 무덤이 조성되었고, 구미리는 자손들이 복록을 누릴 생거지지(生居之地)가 되었으며, 마흘리인계면의 대명당으로 최고의 길지(吉地)가 되었다. 이씨 부인은 부귀와 영화를 누릴 땅보다 자손들이 백세 되도록 복록을 누릴 구미리의 녹갈암 아래에 터를 잡은 것이다. 유복자를 안고 온 이씨 부인은 자손을 번창시켜야 한다는 큰 뜻을 갖고 택지를 한 것이다. 현재도 녹갈암 아래가 남원 양씨(南原楊氏)의 종택(宗宅)이 들어 서 있다.

[열부 이씨는 고려 시대 전형의 마을을 가꾸다]

마침내 이씨 부인동계면 구미리 녹갈암 아래에 둥지를 틀었다. 녹갈암은 구미리의 주산인 무량산[구악산(龜岳山)]에서 내려온 지기(地氣)가 뭉쳐 있는 곳이다. 그 기운이 남원 양씨의 종택을 이루게 되었다. 다른 마을은 대체로 남자들이 입향조로 이름을 올리지만, 구미리는 아들 양사보를 안고 들어온 이씨 부인이 입향조이다.

그는 가장 먼저 우물을 팠는데, 후세에 이씨 부인이 판 샘이라 하여 ‘대모(大母) 샘’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그는 무량산 중턱에 독서암(讀書庵)을 짓고 양사보가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양사보가 자라면서 사냥을 즐기고 학업을 게을리 하니 이씨는 자결을 하려고 밥을 물리치고 얼굴을 무릅쓰고 누워서 아들을 매우 나무라니 아들 양사보가 크게 깨달아 학문에 나가 대학자가 되어서 함평 현감까지 지냈다.

이씨 부인이 아들 양사보 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학문에 정진하여 문과 급제자가 많이 나오도록 힘썼다. 구미리 마을 앞에는 한일 자 형의 안산이 있는데, 그곳에 칠성 바위가 있다. 이 칠성 바위에는 북두칠성이 조각되어 있다. 북두칠성은 과거 급제를 관장하는 문창제군(文昌帝君)으로 조선 시대 선비 계층에 널리 신앙된 문형(文衡)의 신(神)이었다. 구미리의 유생들이 과거에 응시하기에 앞서서 칠성 바위를 찾아 합격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녹갈암 아래 터를 잡은 영향인지 칠성 바위의 영향인지 모르지만, 조선 후기 구미리에서는 과거 급제자가 30여 명이 배출될 정도였다. 30여 명에는 생원 진사 합격자가 18명, 문과 급제자가 12명에 이르렀다. 이토록 한 마을에서 과거 급제자가 30여 명 배출되었으니 남원 양씨는 순창에서 문벌지족으로 권세가 창대해 갔다.

또한 구미리에는 돌 거북이가 마을 입구에 놓여 있다. 구미리의 지명이 이 마을거북에서 나왔다. 자연석으로 된 이 거북은 거북의 꼬리가 마을로 향하게 놓여 있기에 ‘구미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마을 앞에 놓인 돌거북은 구미리가 풍수지리적으로 재물이 약하다 하여 마을에 재물이 모이도록 조성해 놓은 것이다. 거북의 머리는 마을 밖의 취암사(鷲巖寺)를 향하여 취암사의 재물을 먹고, 구미리에 똥을 싸 달라는 의미에서 꼬리를 마을로 향하게 놓아두었던 것이다. 재물 손실을 입은 취암사 승려들이 화가 나서 나무망치를 들고 구미리를 찾아와서 거북 머리를 내리쳤더니 적성강 변 연못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도 구미리의 돌거북 머리는 잘린 모습으로 놓여 있다.

돌거북과 함께 마을 입구에 수구막이 선돌을 세웠다. 마을의 지기가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을의 수구에 선돌 2기를 세우고 숲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후손들이 편안하게 복록을 누릴 수 있도록 풍수 비보(裨補) 장치까지 해놓은 것이다. 구미리는 고려 시대 전통 마을이 어떠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모범적인 씨족 마을이다. 전통 마을은 대체로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에 조성된 곳이 많지만, 구미리는 전란과 관계없이 가문과 후손의 번창을 위하여 자손만대 복록을 누릴 땅을 택지한, 고려 시대 택지법으로 조성된 곳이다.

[600여 년 역사를 가진 전통 마을을 이루다]

이씨 부인은 정절을 지키고 자손을 번창시켜 일약 문벌지족으로 성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세조 대왕께서 그 정절을 아름답게 여겨 정려(旌閭)를 내려줄 것을 명하였다. 구미리 마을 입구에 이씨 부인에게 내린 정려가 위치하고 있다. 이씨 부인은 가문의 전통을 지키려 남편과 시아버지의 홍패를 가슴에 품고 남원까지 내려왔으며, 친정 부모의 간곡한 부탁인 개가를 뿌리치고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다는 정조 관념과 자손을 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순창의 남원 양씨가 대대로 번창하게 만들었다. 대체로 효자 열부의 정려는 부모 봉양이 우선적인 가치 기준이지만, 동계면 구미리이씨 부인은 정절과 자손 번창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려를 받은 특이한 사례이다.

구미리이씨 부인이 택지한 이래 자손들이 번성하여 6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남원 양씨 집성촌으로 터를 지켜 내고 있다. 순창 지역의 대표 성씨를 ‘신설양(申薛楊)’이라고 부른다. 고령 신씨(高靈申氏), 옥천 설씨(玉川薛氏)[순창 설씨], 남원 양씨가 순창의 3대 성씨라는 것이다. 또한 이씨 부인이 가슴에 품고 내려온 과거 합격증 홍패는 고려 시대의 과거 제도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남원 양씨 종중 문서 일괄로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5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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